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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 희생되었다.
제암교회 만행 사건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리타 중위 부대는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십오 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했다.
2.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을 찾아가 불러 왔다.
3.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
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4. 아리타 중위가 사격 명령을 내렸고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사격했다.
5. 사격이 끝날 무렵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6. 바람이 세게 불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했다.
7. 교회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사람이 사살 당하고 '노경태'는 끝까지 산으로 탈출하여 살았다.
8. 마을에서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십구 세)가 군인들에게 살해 당했다.
9. 군인들이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총살했다.
당시 불에 탄 제암교회 터에는 이십삼 인 상징 조각물이 있고, 지금의 제암교회는 세 번
째 지은 교회이다. 아담하고 단아하게 지은 교회에 앉아 짧은 기도를 드리는 동안 마음
이 많이 아팠다. 제암교회 만행을 참회하는 일본인들이 모금을 하여 일천구백칠십 년 새
로운 교회를 지었지만 그 교회는 삼일정신교육관을 지으며 없어졌다. 그 교회를 원형 그
대로 정신교육관으로 사용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과거의 흔적을 없애
는데 너무 심사숙고 하지 못한 면이 많다. 오래 된 것이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가치에 따라서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제암교회 일층(제암리 삼일운동순국기념관)에는 당시의 상
황에 대한 여러 가지 고증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나에
게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이 한 몸 돌보지 않고 나라에 몸
바쳐 만 번 죽더라도 앞으로 나갈 것을 하느님과 조상에 맹
세하노라"고 혈서를 쓴 어느 청년의 글이었다. 많은 우국지
사가 이런 맹세를 하고 험하고 거친 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
애국청년이 조국의 독립을 위
해 몸을 바치겠다는 맹서를 봉공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멸사봉공, 견마의 충성
하느님과 조상 앞에 쓴 혈서 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글을 혈서와 함께 일본 천황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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